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Dutch, 1853-1890 Wheat Field Behind Saint-Paul Hospital with a Reaper 1889 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 손손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시리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여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집 안방 짓두광주..
안드레스 조른 Anders Zorn Swedish, 1860-1920 Göthilda Fürstenberg 1898 상강(霜降) 박경희 낼모레면 칠십 넘어 벼랑길인디 무슨 운전면허여 읍내 가는디 허가증이 필요헌가 당최 하지 말어 저승 코앞에 두고 빨리 가고 싶은감? 어째 할멈은 다른 할매들 안 하는 짓을 하고 그랴 워디 읍내에 서방 둔 것도 아니고 왜 말년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여 오 개월 걸려 딴 운전면허증에 한 해 농사 품삯으로 산 중고차 끌고 읍내 나갔던 할매 후진하다 또랑에 빠진 차 붙들고 오매, 오매 소리에 초상 치르는 줄 알고 달려왔던 할배 그리 말 안 듣더니 일낼 줄 알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풀린 다리 주저앉히고 다행이여..
한스 토마 Hans Thoma German, 1839-1924 Die Quelle (The Spring) 1895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출처:《님의 침묵》, 초판19..
베니 솔단-브로펠트 Venny Soldan-Brofeldt Finnish, 1863-1945 Kaarina Antintytär 1933 서울역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밤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 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
루이지 마스트란젤로 Luigi Mastrangelo Italian, 1958 Green 2011 Acrylic on canvas Painting 70 x 50 cm. 생명 김지하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생명이란 말은 김지하의 시로 들어가는 열쇠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 전체를 포괄하는 내용이며, 주제이고 그의 마지막 목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시는 생명에서 시작하여 생명을..
이츠차크 타르카이 Itzchak Tarkay Israeli, 1935-2012 TARKAY SERIGRAPH "NEIGHBORS II 2008 serigraph in color Prints & Graphic Art 18" x 17.875"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험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뎁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르네 기엣 René Guiette Belgian, 1893-1976 Couple 1927 Gouache Painting 54 x 41,7 cm 백년(百年) 문태준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백년이라는 글씨 저 백년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백년 등을 대고 나란..
필리포 인도니 Filippo Indoni Italian, 1800-1884 A source of amusement 1877 oil on panel Painting 18¼ x 13 5/8 in.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것을 믿는다. 다만 그..
Unknown Harbor Town Oil on canvas 29 3/4 x 39 3/4 inches 줄포만 안도현 바다는 오래된 격지를 뜯듯이 껍질을 걷어 내고 있었다 개펄이 오목한 볼을 실룩거리며 첫 아이 가진 여자처럼 불안해서 둥그스름 배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붉은어깨도요 1664마리, 민물도요 720마리, 알락꼬리마도요 315마리에게 각각 날개를 달아주고 눈알을 닦아주었다 그들의 부리를 매섭게 갈아 허공에 띄워 올리는 일이 남았다 가을 끄트러머리쯤에 포구가 폐쇄된다고 한다 아버지의 눅눅한 사타구니로 자글자글 습기가 번질 것 같다 어머니가 먼저 녹슬고 서글퍼져서 석유곤로에 냄비를 얹겠지 나는 가무락조개 빈 껍질처럼 하얗고 얇구나 수평선을 찢을 배 한..
토마스 벤자민 케닝턴 Thomas Benjamin Kennington British, 1856-1916 The Wedding Dress 1889 Oil on canvas Painting 112 by 87cm 애너벨 리 에드거 앨런 포 옛날 아주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ㅡ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아무 생각이 없었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이 이유였지, 오래 전, 바닷가 이 왕국에선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