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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 문태준」,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나는나무 2024. 9. 9. 18:50르네 기엣
René Guiette
Belgian, 1893-1976
Couple
1927
Gouache
Painting
54 x 41,7 cm
백년(百年)
문태준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백년이라는 글씨
저 백년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백년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백년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백년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출처:《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사, 2008.
□ 반경환 시인 감상
문태준 시인의 「백년」이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일까? 백년이란 꿈과도 같은 말이며,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한 인간의 삶을 말한다. 왜냐하면 백년이란 지난날의 인간의 수명이 4~50세에 불과했기 때문이고, 영원한 사랑의 시간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란 무엇인가? 부부란 인생의 동반자이며, 영원한 사랑의 연주자라고 할 수가 있다. 어렵고 힘들 때에도 서로서로의 등을 두드려주고, 즐겁고 기쁠 때에도 그 기쁨을 함께 맛본다.
사랑은 무한히 참고 견디며, 우리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의 최고의 절정의 순간과 그 열매들을 수확하게 만든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정조와 육체마저도 허락하게 만들며, 사랑은 또한 자기 자신의 욕망과 취미와 직업과 전재산마저도 다 바치게 만든다.
좋은 아내를 얻은 남편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 좋은 남편을 만난 아내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부부는 인간 사랑의 근복축이며, 이 부부의 힘에 의해서 이 세상을 더욱더 푸르러지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전진을 하게 된다. 백년은 모든 부부의 꿈이며, 영원한 사랑의 시간대이다.
문태준 시인의 「백년」은 다만 환영이며, 그 실체가 없는 시간대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가 병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고장이 났다는 것이며, 그 영원한 사랑의 꿈이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불가능하지만 더없이 달콤했던 영원한 사랑, 불가능하지만 더없이 아름다웠던 영원한 사랑, 불가능을 밀쳐버리면서 만물의 창조주로서 수많은 자손들의 존경을 받으며 불로장생하고 싶었던 영원한 사랑 ㅡ .
영원한 사랑, 이 영원한 사랑에 대한 회한이 문태준 시인의 「백년」에는 더없이 아프고 아름다운 슬픔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나의 분신이며, 그 아내를 잃는다는 것은 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세상의 꽃들》, 지혜, 2017.에서 발췌.
□ 문태준 시인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산문집으로 《느림보 마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가 있다.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출처: 교보문고 작가파일, 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