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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나는나무 2024. 9. 9. 13:59
필리포 인도니
Filippo Indoni
Italian, 1800-1884
A source of amusement
1877
oil on panel
Painting
18¼ x 13 5/8 in.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출처:《현대문학》, 1958년 발표.
황동규 시인이 고등학교 3학년(18세) 때의 작품.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겨울이 깊어 가고 또 멀리서 봄이 다가오는 계절이면 이 시가 아름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만큼 이 시는 우리의 가슴을 울려 주는 서정적 진실을 담고 있어 그 아름다운 울림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계절 어디론가 황망하게 떠나갔던 나, 참나를 생각하게 되고, 또 멀리 있는 벗들과 연인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을은 밖으로 향했던 나의 시선이 안으로, 내면으로 돌아와 맑고 밝게 영혼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인 것입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며, 내 안에서 진정한 자아, 참나를 찾아야 할 시간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 시와 대비대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데 //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미당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황동규 시인은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으로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고 있군요. 실상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한없이 외롭게 하고 괴롭게 하며, 무언가 그립게 하고, 또 기다리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움과 외로움, 괴로움과 기다림은 사랑하는 마음의 한 식구들입니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지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처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 같으면서도 늘 그 속에서 그리움과 외로움, 괴로움과 기다림을 앓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삶 속에 육화되면서 생활 그 자체가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 겨울은 누군가를, 따뜻함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러기에 더욱 외로워지고, 그러다 보면 괴로워지고, 하염없이 기다림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무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정들여 가꾸어 왔던 마지막 나뭇잎을 미련 없이 떨구어 버리고 새봄의 싹눈과 꽃자리를 준비하듯이 우리도 마음속의 부질없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떨쳐 버리고 마음 속 사랑의 거울을 더욱 맑고 밝게 닦아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출처:《작은 들꽃이 보고 싶을 때》,
문학수첩, 2003.
□ 황동규 시인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영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꽃의 고요』 등의 시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대산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출처: 문학과지성사 작가파일,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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