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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반 리셀베르게 

Théo van Rysselberghe 

 

Belgian, 1862 - 1926

Le modèle assoupi (1924) 
- The sleeping model, 
1924


Canvas 

Painting 

105 x 116 cm 

 

 

 

 

목소리들 

 

                            이원   

 

 

 

돌,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빛,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버리며 

벽,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길,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창, 닿지 않을 때까지 

겉, 치밀어 오를 때까지 

안,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피, 뒤엉킨 것

귀, 기어 나온 것 

등, 세계가 놓친 것 

색,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눈,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별, 찢어진 것 

꿈, 피로 적신 것 

씨, 가장 어두운 것 

알,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뼈,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손,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입, 거기에서도 붙잡힌 

문,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몸,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신,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꽃, 토사물 

물, 끓어오르는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흰, 퍼드덕거리는 

 

 

 

 

 

 

※출처:《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2012.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이원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1992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현대시학 작품상, 현대시 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등단 20년을 맞이한 저자의 이번 시집은 모두 57편의 수상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의 서늘하고 낯선 그늘과 일상 속에 감춰진 존재의 고독,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접변한 지점에서 존재의 배후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예감하는 고된 행보, 그래서 알게 된 세계의 비밀을 공유한다. 이전의 시집보다 더욱 심화되고 전면화한 양상을 띠는 존재의 심연, 사물들의 내밀한 고독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적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실존의 한계성, 사물들의 본질, 고독에 거함으로 가닿을 수 있는 세계 너머에 대한 생각들이 담긴 ‘시즌 오프’, ‘책을 펴는 사이 죽음이 지나갔다’, ‘구겨진 침대 시트 또는 다친 정신이 기억함’, ‘봄밤의 아파트’,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등의 57편의 시편들을 모두 4부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저자
이원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12.10.15

 

 


 

 

□  황인숙 시인 감상 

 

이것은 개인어사전인가? ㄱ(겉, 귀, 길, 꽃, 꿈), ㄴ(나, 너, 눈), ㄷ(돌, 등), ㅁ(몸, 문, 물), ㅂ(벽, 별, 빛, 뼈), ㅅ(색, 손, 신, 씨), ㅇ(안, 알, 입), ㅊ(창), ㅋ(칼), ㅍ(피), ㅎ(흰). 자음글자 열네 개에서 ㄹ, ㅈ, ㅌ이 빠졌군. 

 

어느 글에선가 장정일이 썼듯이 소설이든 시든 수필이든 모든 문학 텍스트는 개인어사전이다. 그러한 즉, 앞의 말머리는 애초에 하나마나한, 그저 내 둔한 머리를 풀기 위한 꼼지락거림이다. 내 어설픈 꼼지락 거림이 한 상 잘 차린 시인의 이 진수성찬을 꾸드러지게 만들까 봐 조바심 내면서 또 꼼지락. 

 

「목소리들」은 정신분석의 자유연상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그런데 형식이 그렇다뿐이지 내용은 정반대다. '자유연상'은 말 그대로 '의식'적 통제를 중지' 시켜야 하는 것인데, 「목소리들」은 팽팽하게 의식을 통제하고 있다. 베테랑 잠부(蠶婦)가 '거기까지' 닿도록 숨을 참듯이. 

 

이원은 상상력을 집요할 정도로 끌고 나가서 그것을 정교하게 '그리는' 시인이다. 「목소리들」을 전시회 제목이라 치고 시인이 프로듀스한 대로 둘러보자. 각 행을 시작하는 명사들은 그림 제목이다(맨 뒤 행의 '흰'만 형용사인데, '퍼드덕거리는'은 「목소리들」을 아우르는 공감각적 색조다). 명사들-사물들의 목소리들을 그림으로 펼친 시라! 이원 시의 큰 매력은 새라새로운 형식, 그리고 관념이라는 질료를 마치 진흙이나 되는 듯이 갖고 노는 듯한 기교다.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는 집요함, 의식의 임계점에서는 관념이 꿈틀거리며 구체적인 형상을 만드나 보다.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너는 또 하나의 나인가? 나는 허공에 있다. 거울이라는 허상에서 빠져나와. 

 

나와 너, 혹은 나와 '나'가 부딪쳐서 생기는 '관계'에서 파생하는 극명한 현실 현상의 세목들을 「목소리들」은 연계성이나 개연성, 감정을 생략하고 토막토막 제시하는데, 문득 휴거 현장을 목도하는 듯하다. 환희에 찬 휴거가 아니라 "등, 세계가 놓친 것"들이 산산이 날아가는 휴거를. 시인의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앙망과 절망! 

※출처:《하루의 시》, 책읽는수요일, 2016. 

 

 

 


 

 

□  이원 시인 

 

 

 

 

1992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

『나는 나의 다정한 얼룩말』 등이 있다. 

※출처: 문학과지성사 작가파일, 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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