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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Dutch, 1853-1890

Wheat Field Behind Saint-Paul Hospital 
with a Reaper 
1889 

 

 

 

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 손손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시리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여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출처:《낡은 집》, 초판1938.11. 

 
낡은 집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 출간 10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시 초기를 빛낸 스무 권을 가려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으로 선보인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20세기 초는 시대적 고통과 개인의 천재성이 만나 탁월한 시집이 다수 출간된 시기이다. 이번 100주년 기념판은 높은 성취를 이룬 당대의 시집들을 엄선해, 원문에 충실하게 편집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더해 우리 시 탄생의 순간들을 다시 새롭게 전달하고 있다. 수록 작품들을 초간본 그대로 배열 및 편집 했으며 말미에 정확한 간기(刊記)를 수록해 본디 의도를 최대한 반영했다. 동시에 시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표기를 오늘날에 맞춰 바꾸고 이남호 고려대 명예교수의 책임편집 아래 오기를 수정하는 등 철저한 교정 과정을 거쳤다. 나아가 상세한 각주와 문학사적 의의를 설명한 해설을 더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낡은 집』 이용악의 두 번째 시집. 15편의 시를 담고 있다. 시인의 관심은 줄곧 현실의 피폐한 실상을 구체적 정황을 통해 제시하는 데에 맞춰져 있다. 〈낡은 집〉이라는 심상을 통해 삶의 피폐와 절망이 서정성과 결합하여 절실하면서도 격조 높은 비애로 승화되었다는 점에서 오래 기억될 만한 시집이다.
저자
이용악
출판
열린책들
출판일
2023.03.25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초목의 뿌리나 잎새로 연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보풀'을 먹는 사람이 23,062호에 11만 2,362명을 비롯하여 소나무껍질, 머름, 칡뿌리 등 30여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약 17만 호에 71만 3천 명인즉 총인구의 6할이다." 

 

"장수지방 계북면 임평리에서는 세민들이 궁한 나머지 이곳의 심곡산에서 나는 백토(白土)를 식용으로 하며 이 때문에 마을사람 다수가 변비에 걸린 실례이다." 

 

이 두편의 글은 일제 강점하 우리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내용입니다 (동아일보 1924년 10월 21일자 기사, 강만길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p.82~85 재인용). 그만큼 이 땅 농촌의 궁핍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도한 내용이라고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식민지 치하 수탈상황에서 우리 민족, 특히 대부분의 농민은 적자영농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다시 고용농(머슴)으로 분해되다가 마침내 파산해서 이른바 한 가족이 몽땅 '야반도주'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는 유이민이 되어 여기 저기 흘러다니거나 화전민이 되기도 하고, 또는 도시로 나아가 품팔이를 하거나 걸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20~30년대 이 땅 유이민의 참상을 묘파한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민족, 민중들을 이 땅 간난의 삶과 시련의 역사를 어기차게 헤쳐 왔다는 말씀입니다. 

※출처:《해지기 전 그대 그리워지면》, 

문학수첩, 2003. 

 

 


□  이용악(1914~1971) 시인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및 조치대학 전문부 신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 「패배자의 소원」(『신인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조선문화단체총연맹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세칭 ‘남로당 서울시 문화예술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으로 출옥해 북한군에 합류, 월북하였다. 

월북 후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부주필 등을 역임했으며, 

1971년 폐병으로 타계했다. 

 

시집으로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이용악집』 『리용악 시선집』 등이 있다. 

※출처:문학과지성사 작가파일, 이용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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