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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형 주 

Jeon HyungJoo 
Korean, 1959 

Mind Way  
2017

oil on canvas 
Painting 
60.6×72.7cm 

 

 

 

 

 

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출처:《히말라야 독수리》, bookin. 2012. 

 

 


□  황인숙 시인 감상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를 '문득 한 깨달음 주려는가'로 읽어도 좋을까? 시에 두 개의 개심이 나온다. 개심(開心)과 개심(改心). 앞의 개심은 '지혜를 열어 불도(佛道)를 깨우친다' 즉 '마음이 열린다'는 뜻으로 굉장히 높은 경지의 말이고, 뒤의 개심은 '마음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으로 범상한 우리네 경지의 말이다. 

 

별아간 소낙눈이라지만, 눈이 쏟아지기 전에도 하늘은 끄무레했을 것이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처럼. 범상한 한 사람인 시인은 깨달음과 번민, 용서와 상처 사이에서 진자처럼 움직이는 마음의 불평에 처해 있다. 울퉁불퉁한 그 마음 바닥이 눈경치를 바라보면서 둥글어지는 듯하다. 곡선은 고요하다.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내리고 쌓여 이루는 설경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은 그러하나, 나(시인)는? 나는 기실 뾰족뾰족하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하지 말자". 

 

뭐, 눈이 오기에 잠시 취해 있었을 뿐, 호락호락 개심(開心)할 내가 아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마음의 고요, 평심의 입구 산문에서 그저 설경을 바라볼 뿐이로다. 

 

소박하고 단아한 시인데, 호락호락 깨달은 척하지 않는 총명함이 톡쏘는 맛을 낸다. 

※출처:《하루의 시》, 책읽는수요일, 2016. 

 


□  신현락 시인 감상 

 

 

 

1960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하여 수원에서 성장하였다.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활동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시집으로『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을 간행하였으며 

논저로『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이 있다. 

※출처:교보문고 작가파일, 신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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