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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뻔한 이야기 - 이현승」, 유령들 낮에 켜진 전등처럼 우리는 있으나마나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파리채 앞에 앉은 파리의 심정으로 우리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이다. 따귀를 때리러 오는 손바닥 쪽으로 이상하게도 볼이 이끌린다
나는나무 2024. 9. 13. 19:40마르신 그레고르츠크
Marcin Gregorczuk
Polish, 1977
Cold Water
2023
acrylic (akryl)
Painting
81 x 65 cm
있을 뻔한 이야기
이현승
유령들
낮에 켜진 전등처럼 우리는 있으나마나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파리채 앞에 앉은 파리의 심정으로
우리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이다.
따귀를 때리러 오는 손바닥 쪽으로
이상하게도 볼이 이끌린다.
파리를 발견한 파리채처럼 집요하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메시지가 온다
미션-임파서블
40대 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게 뭘까? 서점에 가봐야겠다.
삶은 여전히 지불유예인데,
우리는 살면서 한 가지 역할놀이만 한다.
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
우리는 아직 올라가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내려가라고 하네요.
40대가 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30대가 되기 전에 했어야 할 일들이다
귀신들
하긴 딴 사람은 없는데
잃은 사람만 있는 판돈 같은 이야기,
혹은 빌린 사람은 없는데
빌려준 사람만 있는 신체포기각서 같은 이야기.
"내 다리 내놔" 하면서 따라오던 귀신은
어쩌다 다리를 간수하지 못했을까?
하긴 때린 사람은 없는데
언제나 아픈 사람만 있는 폭력적인 이야기,
끈덕지게 따라붙는 귀신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눈코입도 없이 자꾸만 따라다니는 달걀귀신 같은 이야기.
※출처:《친애하는 사물들》,문학동네, 2012.
□ 황인숙 시인 감상
《친애하는 사물들》은 매력적인 시집이다. 지적이면서 무겁지 않고, 재기 넘치면서 가볍지 않은 시편들이 처처에 포진해 있다. 그중에서 이 시를 고른 건 '채무자'니 '판돈'이니 소재들도 친근하고, 시구에서 즉각적으로 전해지는 심경이 어째 딱 내 이야기 같아서이리라. 문제는, 화자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대부분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있을 뻔한 이야기'는 시집 해설자가 간파한 대로 '있을, 뻔한 이야기', '뻔하게' 있었던 이야기, 있는 이야기!
자기존재의 왜소함과 수동성, 그 바스라질 듯한 상태를 질깃질깃하게 보여주는 시, 「있을 뻔한 이야기」에서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이다"라는 시구를, '부채감'이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쓰였을 수도 있을 테지만, 실제 빚쟁이의 심사로만 풀어보자. 물질이 마음을 지배하는 세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 마음이 물질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큰 빚을지면 기가 죽어서 몸도 쪼그라드는 듯해진다. 존재감이 크게 위축된다.
시의 화자는 자발적,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떤 일을 해낼 방도도 없고 힘도 없다. 운명이 남에게 달려 있다. 운명이 남에게 달려 있으니 그건 산다고도 볼 수 없다. 유령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존재감 없는 화자한테 "집요하게 / 돈을 빌려주겠다는 메시지", 대부업체 스팸메일 같은 것이 따라붙는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유령을 따라붙는 귀신들이라니, 얼마나 지독한 귀신들인가. 유령도 벗어날 수 없는 귀신들!
물(物)로나 심(心)으로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지 않을 수 잇는 사람은 복되다! 빚을 진다는 건, 영혼을, 심장을 저당 잡힌다는 것이다.
존재가 희미해져가는 절망감 속에서도 귀신들을, 그 상황을 유유히 지켜보는 시인이여!
※출처:《하루의 시》, 책읽는수요일, 2016.
□ 이현승 시인
1973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1996년 [전남일보],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등이 있다.
2012년 7회 솔뫼창작기금을 받았으며,
현재 계간 [시작] 편집위원이다.
※출처: 예스24 작가파일, 이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