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uk Park Korean, 1944 Persimmon tree, 2012 oil on canvas Painting 31.8×40.9cm 십오 촉 최종천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한 알의 밝기는 오 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내 담장을 넘어와 바라볼 때마다 침을 삼키게 하는, 그러나 남의 것이어서 따 먹지 못하는 홍시는 십오 촉은 될 것이다 따 먹고 싶은 유혹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마찰하고 있는 발열 상태의 필라멘트 이백이십짜리 전구를 백십에 꽂아 놓은 듯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떨어지지 않는 십오 촉의 긴장이 홍시를 켜 놓았다 그걸 따 먹고 싶은 홍시 같은 꼬마들의 얼굴도 커져 있다 ※출처:《눈물은 푸르다..
Chiu Ya-Tsai Taiwanese, 1949-2013 Lady in Floral Dress, 1994 Oil on canvas Painting 130 x 97 cm 등단 이후 한명희 시인 되면 거 어떻게 되는 거유 돈푼깨나 들어오우 그래, 살맛 난다. 원고 청탁 쏟아져 어디 줄까 고민이고, 평론가들, 술 사겠다고 줄 선다. 그뿐이냐. 베스트셀러 되어 봐라. 연예인, 우습다. 하지만 오늘 나는 돌아갈 차비가 없다. ※출처:《시집읽기》, 시와시학사, 1996.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시인 등단, 누구나 평생 한 번쯤은 꿈꿔 볼 만한 일일 겁니다. 신문잡지에 당선 소감이며 사진도 실리고 작품이 수록돼서 온 ..
Robert OreansMy German, 1874-1963 mother, 1935 Oil on canvasPainting 63,5 x 46 cm 노모老母 문태준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출처:《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
Jenő Medveczky Hungarian, 1902-1969 MEDVECZKY JENŐ (1902-1969) - Íriszek vászon 50x40,5 cm 어두운 골목 붉은 등 하나 이병률 상가喪家 음식에서 착한 맛이 난다는 생각을 하는 데 오래 모르는 문상객들 틈에 앉아 눈 맞춰가며 그래도 먹어야 하는 일이 괜찮아진 지 오래 조금 싸다가 한 며칠 차려 먹으면 좋겠다 싶게 상가 음식은 이 세상 마지막 맛인 듯 만나고 상가를 지키는 이들의 말소리는 생전에 가장 달고 배고프지 않았는데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지 몰라 나무젓가락 포장지 접은 걸로 탁자 밑에 알지도 못하는 글씨를 쓰고 있노라면 국 한 그릇 더 떠오며 ..
Alicja Kappa Polish, 1973 Zapachy lata, 2019 oil, acrylic, schagmetal, canvasPainting 100 x 100 cm 적막한 식욕 박목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Dog, 2012 Screenprint in colours Prints & Graphic Art sheet 355 x 458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이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František Daněk-Sedláček Czech, 1892-1956 Winteroil, cardboardPainting 39 x 49 cm 빙하기 이가람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밝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아홉 살의 강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 안 추운 氷壁 밑에서 검은 목탄으로 뎃싱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선박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
Alicja Kappa Polish, 1973 Hot Day, 2022 Acrylic, Oil, Canvas, Metal Painting 100 cm x 100 cm 생명 김지하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생명이란 말은 김지하의 시로 들어가는 열쇠어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 전체를 포괄하는 내용이며, 주제이고 그의 마지막 목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시는 생명에서 시작하여 생명을 통..
Kazimierz Mikulski Polish, 1918 - 1998 PRZED ODLOTEM, 1989 oil, canvas Painting 73 x 60 cm 오늘 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우리는 오늘도 하루하루, 한 ..
Elizabeth Coyle Brazilian, 1956 Sweet acrylic on canvas Painting Size: 91 x 123cm 추모합니다 이성미 나는 읽는다 너는 가고 네가 남긴 책갈피에서 머리카락이 아침 국그릇에 떨어졌다 호수처럼 국물이 출렁, 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출처:《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사, 2005. □ 정끝별 시인 감상 누구의 머리카락이었을까. 네가 가고 내가 읽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너는 누구였을까. 사랑의 빈자리는 넓기만 합니다. 사랑이 머물다간 흔적을 머리카락 한 올이 지탱하고 있습니다. 더럭, 터럭 한 올이었겠습니다. 그래도 산다는 건, 국 국물에 빠진 네 머리카락 한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