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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tišek Daněk-Sedláček 

Czech, 1892-1956 

 

Winteroil, 

 

cardboardPainting 

39 x 49 cm 

 

 

 

 

빙하기  

 

                           이가람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밝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아홉 살의 강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 안 추운 氷壁 밑에서 

검은 목탄으로 뎃싱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에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선박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영원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갈색머리 흑인여자의 서러운 이빨같이 

서걱이는 한겨울 밤바다 살갗은 

유리의 달에 부딪쳐 바스러지고 

죽음보다 거적한 외투 속의 

내 사랑은 

두 주일이나 그냥 있는 젖빛 엽서 

조금씩 미쳐가며 나는 무서운 醉眼인 채 

황폐한 자갈밭을 건너 

흐린 가스등 그늘이 우울한 시장가에서 

눈은 내리고 

하얀 囚衣 입은 천사처럼 잠시 죽어 봤으면 생각하다가 

포효의 거대한 불꽃으로나 멸망하기를 소망하다가, 

아아 자꾸만 목이 메이고 싶어지는 

내 고단한 木管의 노래는 떨려 

나목 끝에 마지막 한 장 가랑잎새로 지는 것을 

씁쓸히 웃으며 있네. 

지난 생 마르뗑의 여름 밤주막에서 

빨갛게 등불을 켜 달고 

여린 불빛들이 우리 잔등에 떨어져 와닿는, 

들끓는 소주를 독하게 마시며 울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그대 건강한 의사가 되겠다고 여름내 엄청난 야망은 살아 

자기 안의 한 무더기 폭약에 放火도 했지만 

참혹하게 파손되어 간 內室이었음을, 

어느 저녁 식탁에선가, 눈물 글썽이게 하는 

그대 슬픈 소식을 건네 들었지. 

지금은 

옷고름처럼 나부끼는 달빛에 젖어 

마른 갯벌 바닥으로 배회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맨발의, 괴로운 밤 게(蟹)가 되어서 돌아오는 

오뇌의 회오리 바람에 은빛 음계들이 머리칼마다 

흩날리며 있네. 

그 드뷔시 찻집 유리 속의 금발이 출렁이는 인형을 

젖은 눈이 성에 낀 창 밖을 보고 

수런대는 목소리들 잔 둘레로 넘쳐나 

비듬처럼 쌓여 가는데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져 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바람과 소리여, 

이 침전하는 葬送의 파도가에 앉아서 단 한번 

고운 색깔이 아롱진 漁眼의 나는 

뜨거운 두 손으로 피곤한 이마를 묻어보네. 

 

 

 

 

 

 

 

※출처:《빙하기》, 1976.6.20.현대문학사 초간본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바람구두'를 신은 멋쟁이 시인 이가림, "당신의 편질 읽고 있노라니/ 무심코 떠오르는 알쥴 랭보의 얼굴/ 서연사연 꿈을 먹고 사는/ 배곯는 영혼의 벌레/ 산다는 게 이렇게 저린 것인가/ 그래 얼마나 외로운 혼자요?/ 나날이"라고 조병화 시인이 노래하던 그대가 이 쓸쓸한 겨울 저녁에 문득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인지요. 

지금도 프랑스 서북해안 가까이 루루앙의 겨울 언덕에 머리칼 날리고 서 있을 그대, 이젠 그 누구와 함께 우리 함께 거닐던 모파상의 훼깡 바닷가 별장 부근의 선창가에 다녀오실런지요. 

 

다시 한 번 그대의 출세작 「빙하기」를 외워봅니다. 그러노라면 60년대의 광화문 골목, 학사주점 근처에 묘령의 아가씨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던 그때 그 창백한 젊은이의 토르소 같은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면서 저 을씨년스런 60년대 후반 이 땅을 뒤덮었던 알 수 없는 쓸쓸함이며, 가난이며, 그 분노와 광기가 하염없이 밀물져 옵니다. 

 

그대의 시 「빙하기」에는 바로 60년대 문학 지망생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그 낭만적인 우울이 넘쳐흐르는 듯싶습니다. 

우선 그 시절의 시에 유행하던 '겨울' 상징이 그렇고요,

또 "예레미야 병원/ 장 바띠스트 클라망스/ 킬리만자로/ 생 마르뗑의 밤주막/ 뒤뷔시 찻집"과 같은 양풍의 소재들이 막연하면서도 신비스런 그 어떤 아련한 환상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요. 

어떠하던가요? 수십 년 전부터 그대가 꿈꾸며 동경하던 그곳 프랑스의 겨울 하늘과 오늘 그대가 가난과 외로움에 떨면서 작은 등불 하나 켜 들고 있는 이국땅 그곳 루앙 언덕의 겨울밤 풍경이 과연 꿈꾸던 그대로이던가요? 

스토브조차 꺼진 낡은 아파트,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며 어둠 속에 자주 멈춰 서던 그대 고물 자동차 때문에 속썩으면서 오늘도 금발의 프랑스 여자며 흑인 여자와 마주하여 들끓는 깔바도스며 독주를 아프게 마시면서 속으로 울고 있지는 않으신지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낭만이 그대를 손짓하고 잡아끌더라도 그대는 어쩔 수 없이 이 슬픈 반도 꼬레의 가난한 시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숙명을 엄혹하게 느끼기까지에는 지난날의 무모하고 황당한 서구 취향의 겉멋이나 감상적 방황과 우울이  반드시 필요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시적인 자아발견의 과정이면서 인간애와 운명애에 깊이 눈뜨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한 과정이었다고 하겠지요. 

 

오늘밤 이 슬픈 반도의 한 흐린 주막에 홀로 앉아서 새삼 선하면서도 애수 어린 그대의 영혼을 떠올리면서 등불의 심지를 새로 돋우어봅니다. 

※출처:《작은 들꽃이 보고 싶을 때》, 문학수첩, 2003. 

 


□  이가람(1943~2015) 시인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당했다.

프랑스 루앙대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리7대학 객원교수, 인하대 문과대학장, 한국불어불문학회장 역임했다.

 

주요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 '미술과 문학의 만남',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 등이 있다. 역서로는 '촛불의 미학', '물과 꿈' 등이 있다.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펜번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인하대 프랑스문화학과 명예교수이며, 계간 '시와시학' 주간을 맡았다. 

※출처: 교보문고 작가파일, 이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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