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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나는나무 2024. 12. 22. 16:20
Dog,
2012
Screenprint in colours Prints & Graphic Art
sheet 355 x 458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이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출처:《애지》, 2004년 봄호.
□ 정끝별 시인 감상
밥그릇 경전이라니, 밥이야말로 태고적부터의 가장 오랜 종교겠습니다.
'밥교'라는!
불경스런 잡념까지 싹싹 핥아가며 밥 잘 비웠겠다,
빈 밥그릇 온몸으로 저리 맘껏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 일없이 '밥그릇이나 씻으러 가야 (洗鉢盂去세발우거)'겠습니다.
제 밥그릇 잘 비우고 제 밥그릇 잘 씻는 일이야말로 선禪의 경지입니다.
밥교의 제1교리겠지요.
개의 불성佛性이며 개의 평상심平常心이 저러하거늘 · · · · · ·.
※출처:《정끝별의 밥시이야기, 밥》, 마음의숲, 2007.
□ 이덕규 시인
19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 『놈이었습니다』가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시작문학상,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교보문고 작가파일, 이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