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 훈 Han Seunghun b.1982. Piece of Mind 2022 oil on canvas Painting 60.6×60.6cm 우편 이장욱 모든 것은 이미 배달되었다. 그것이 늙은 우편배달부들의 결론, 당신이 입을 벌려 말하기 전에 내가 모든 말을 들었던 것과 같이 같은 계절이 된 식물들 외로운 지폐를 세는 은행원들 먼 고백에 중독된 여인들 그순간 누가 구름의 초인종을 눌렀다. 뜨거운 손과 발을 배달하고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바로 그 계절로 단 하나의 답장이 도착할 것이다. 조금 더 잔인한 방식으로 ※출처:《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2016. 영원이 아니라서 ..
Norman Catherine South African, 1949 Zebra Suit giclée print Prints & Graphic Art 23 x 20 cm 즐거운 소라게 이창기 잘 다듬은 푸성귀를 소쿠리 가득 안은 막 시골 아낙이 된 아내가 쌀을 안치러 쪽문을 열고 들어간 뒤 청솔모 한 마리 새로 만든 장독대 옆 계수나무 심을 자리까지 내려와 고개만 갸웃거리다 부리나케 숲으로 되돌아간다 늦도록 장터 한 구석을 지키다 한 걸음 앞서 돌아가는 흑염소처럼 조금은 당당하게, 제집 드나드는 재미에 갑자기 즐거워진 소라게처럼 조금은 쑥스럽게,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 한 채의 집을 지은 나는 세 식구의 가장(家長)으로서..
마르신 그레고르츠크 Marcin Gregorczuk Polish, 1977 Cold Water 2023 acrylic (akryl) Painting 81 x 65 cm 있을 뻔한 이야기 이현승 유령들 낮에 켜진 전등처럼 우리는 있으나마나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파리채 앞에 앉은 파리의 심정으로 우리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이다. 따귀를 때리러 오는 손바닥 쪽으로 이상하게도 볼이 이끌린다. 파리를 발견한 파리채처럼 집요하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메시지가 온다 미션-임파서블 40대 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게 뭘까? 서점에 가봐야겠다. 삶은 여전히 지불유예인데, 우리는 살면서 한 가지 역할놀이만 한다. ..
안나 피오트로비악 Anna Piotrowiak Polish, 1983 Symfonia Nocy 2018 acrylic on canvas Painting 100 x 50 cm 가난의 골목에서는 박재삼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
전 형 주 Jeon HyungJoo Korean, 1959 Mind Way 2017 oil on canvas Painting 60.6×72.7cm 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
요안나 미스탈 Joanna Misztal Polish, 1967 Iris 2024 Acrylic, Oil, Canvas, Metal Painting 70 cm x 70 cm 기쁨 나태주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 ※출처:《풀잎 속 작은 길》, 1996.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참 이렇게 좋은 기쁨의 시가 공주 공산성 너머 저 멀리 대숲 일렁이는 나태주 시인의 막동리 초가집에 숨어 있었군요. 난초 잎이 곡선으로 휘어져 허공에 기댄다니요? 허공이 어디 의지할 만한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Dutch, 1853-1890 Wheat Field Behind Saint-Paul Hospital with a Reaper 1889 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 손손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시리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여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집 안방 짓두광주..
안드레스 조른 Anders Zorn Swedish, 1860-1920 Göthilda Fürstenberg 1898 상강(霜降) 박경희 낼모레면 칠십 넘어 벼랑길인디 무슨 운전면허여 읍내 가는디 허가증이 필요헌가 당최 하지 말어 저승 코앞에 두고 빨리 가고 싶은감? 어째 할멈은 다른 할매들 안 하는 짓을 하고 그랴 워디 읍내에 서방 둔 것도 아니고 왜 말년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여 오 개월 걸려 딴 운전면허증에 한 해 농사 품삯으로 산 중고차 끌고 읍내 나갔던 할매 후진하다 또랑에 빠진 차 붙들고 오매, 오매 소리에 초상 치르는 줄 알고 달려왔던 할배 그리 말 안 듣더니 일낼 줄 알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풀린 다리 주저앉히고 다행이여..
한스 토마 Hans Thoma German, 1839-1924 Die Quelle (The Spring) 1895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출처:《님의 침묵》, 초판19..
베니 솔단-브로펠트 Venny Soldan-Brofeldt Finnish, 1863-1945 Kaarina Antintytär 1933 서울역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밤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 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