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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 김영태」, 흰 말(馬) 속에 들어 있는 고전적인 살결, 흰 눈이 저음(低音)으로 내려 어두운 집 은빛 가구 위에 수녀(修女)들의 이름이 무명으로 남는다 화병마다 나는 꽃을 갈았다 얼음 속에 들은 엄격한 변주곡,
나는나무 2024. 12. 29. 16:55
Richard Alan Schmid
American, 1934 - 2021
Nude,
1969
oil on canvas Painting
24 x 18 inches
첼로
김영태
흰 말(馬) 속에 들어 있는
고전적인 살결,
흰 눈이
저음(低音)으로 내려
어두운 집
은빛 가구 위에
수녀(修女)들의 이름이
무명으로 남는다
화병마다 나는
꽃을 갈았다
얼음 속에 들은
엄격한 변주곡,
흰 눈의
소리 없는 저음
흰 살결 안에
람프를 켜고
나는 소금을 친
한 잔의 식수를 마신다.
살빠진 빗으로
내리 훑으는
칠흑의 머리칼 속에 나는
삼동(三冬)의 활을 꽂는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겨울이 깊어 가면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마련이지요.
하늘이 무겁게 내려 가라앉고 안단테 칸타빌레 하얀 현(絃)의 눈이라도 흩뿌리노라면 방 안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낮게 깔리는 첼로나 콘트라베이스의 선율에 잠기는 겨울 행복에 잠겨보는 것이지요.
김영태 시인의 시 「첼로」는 이러한 겨울 풍정을 깊고 그윽하게 형상화한 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흰 말과 흰 눈, 얼음과 소금,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수녀와 칠흑의 머리칼이 함께 어울려 빚어 내는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는 겨울의 내면 풍경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울러 "흰 눈이/ 저음으로 내려/ · · · · · · 중략 · · · · · ·/ 얼음 속에 들은/ 엄격한 변주곡, / 흰 눈의/ 소리 없는 저음/ 흰 살결 안에/ 람프를 켜고/ 나는 소금을 친/ 한잔의 식수를 마신다."라는 공감각적 이미지들의 조응 속에는 알지 못할 삶의 비의와 신(神)의 섭리가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나날이 삭막해 가는 현실, 거칠기 짝이 없는 일상을 그저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이러한 흰 눈과 첼로의 저음 속에 담겨 있는 원시적인 자연의 숨결과 따뜻한 인간의 체온, 그리고 싱싱한 예술의 향기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지않겠습니까?
※출처:《작은 들꽃이 보고 싶을 때》, 문학수첩, 2003.
□ 김영태(1936~2007) 시인
1936년 서울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1959년 '사상계'에 '설경', '시련의 사과나무', '꽃씨를 받아둔다'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2년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1982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9년 서울신문사 예술평론상.
2004년 허행초상.
2007년 작고.
저서로 시집 '유태인(猶太人)이 사는 마을의 겨울'(중앙문화사, 1965), '바람이 센 날의 인상(印象)'(현대문학사, 1970), '초개수첩(草芥手帖)'(현대문학사, 1975), '객초(客草)'(문예비평사, 1978), '북(北)호텔'(민음사, 1979), '여울목 비오리'(문학과지성사, 1981), '어름사니의 보행(步行)'(지식산업사, 1984), '결혼식과 장례식'(문학과지성사, 1986),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민음사, 1989), '매혹'(청하, 1989), '남몰래 흐르는 눈물'(문학과지성사, 1995), '고래는 명상가'(민음사, 1993), '그늘 반근'(문학과지성사, 2000), '누군가 다녀갔듯이'(문학과지성사, 2005) 등이 있다.
※출처: 교보문고 작가파일, 김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