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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란(寒蘭) - 최승범」, 옥빛 꽃봉으로 해맑게 부풀더니 한 송이 또 한 송이 눈결에 또 한 송이 벙긋이 벙근 아침은 천하 온통 내 것일레
나는나무 2024. 12. 24. 10:28
Chuah Siew Kek
Malaysian, 1947
ORCHIDS
Batik
Decorative Art
43 cm x 57 cm
한란(寒蘭)
최승범
옥빛 꽃봉으로
해맑게 부풀더니
한 송이 또 한 송이
눈결에 또 한 송이
벙긋이
벙근 아침은
천하 온통
내 것일레
마음 들뜨지 말라
차분하라 잔잔하라
눈맞춤 눈을 돌려
책장을 펼쳐 들자
방 가득
옥빛 향기 일어
마음 다시
들썩이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난초만큼 선비들의 시문이나 서화에 즐겨 등장하는 소재 또는 제재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닐 겁니다.
난초 잎의 곧고 부드러운 선미(線美)는 흔히 선비들의 곧은 지절이나 멋스런 풍류를 일컫는 상징으로 쓰이곤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어느 날 아침 벙그는 난초 꽃망울에서 "한 송이 또 한 송이/ 눈결에 또 한 송이/ 벙긋이/ 벙근 아침은/ 천하 온통/ 내 것일세"와 같이 마치 천하를 얻은 듯 큰 기쁨을 느끼고 있군요.
난꽃 한 송이에서 생명 탄생의 기쁨을 느끼고 우주의 숨결을 읽어 내면서 영원을 바라보는 행복감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비의 기품은 절제와 은근한 멋에서 찾아지는 법, 스스로를 "마음 들뜨지 말라/ 차분하라 잔잔하라"고 타이르면서 더욱 마음을 비우고 맑게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군요. 그러나 어디 꼭 그렇게만 될 것인지요?
새로 피어나는 꽃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난향은 암향으로 떠돌면서 "방 가득/ 옥빛 향기 일어/ 마음 다시/ 들썩이네"와 같이 시인을 새삼스럽게 생명감, 생의 약동(ellan vitaie)에 젖어들게 만드는 것이네요.
아, 그러고 보면 선비라는 분들은 참으로 욕심도 없으시군요.
돈과 권력을 탐하고 명예에 취하는 게 아니라, 다만 난향 한 줄기로 마음이 넉넉해지고 정신이 향그러워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진리의 빛으로 학문도 하고 서화를 그리면서 어두운 세상에 끊임없이 맑은 정신의 향기, 영혼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출처:《작은 들꽃이 보고 싶을 때》, 문학수첩, 2003.
□ 최승범 시인
※출처: 알라딘 작가파일, 최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