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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나는나무 2024. 12. 21. 12:08
Choong-Hyun Roh
Snow, 2011-2013
oil on canvas
Painting
canvas 90.9×72.7cm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의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原始林) 아아 원시림(原始林)
그 아득한 세계(世界)의 운반(運搬)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石炭)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世界)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石炭)의 변성(變成)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 가고
숲의 순수(純粹)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世界)가 운반(運搬)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출처: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김재홍 문학평론가 감상
새해, 새마음 새뜻으로
새해가 밝아오면
저는 이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를 새로이 읽어 보는 게 한 습관처럼 되었답니다.
그만큼 이 시가 고달픈 삶 가운데
신선한 감동과 힘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는
어떻게 20대 초의 젊은이가 이렇게 의미 있는 시를 쓸 수 있었을까하여 놀라운 그낌을 갖게 하곤 합니다.
그만큼 하늘(눈)과 땅(석탄)의 비유를 통해 대자연의 순환원리와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명 감각을 신선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의 핵심은 눈과 석탄, 숲과 새의 유추관계에 놓여 있는 듯싶습니다.
그리고 겨울과 행인,
즉 삶의 의미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구요.
눈의 희고 찬 이미지를 중심으로 해서
나뭇가지, 숲길, 원시림, 석탁, 새, 스토브, 불씨, 행인, 화자 등과 같은 보조 심상들이 서로 어울려서
겨울 풍경과 그 속에서의 삶의 모습을 조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새해에는 어디 가까운 교외에라도 가서
흰눈을 마음껏 밟으면서
새삼 어둡기만 한 제 귀를 밝게 하고 흐려만 가는 눈을 맑게 씻고
돌아와서는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새해 새출발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출처: 《작은 들꽃이 보고 싶을 때》, 문학수첩, 2003.
□ 오탁번(1943~2023) 시인
1943년 충북 제천.
백운초. 원주중 ㆍ 고.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
시집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오탁번시전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비백』.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특별상, 은관문화훈장(2010) 수상.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출처:교보문고 작가파일,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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