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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나는나무 2024. 12. 28. 12:26
Alice Neel
American, 1900 - 1984
Jackie Curtis as a Boy
oil on canvas
Painting
canvas 44 by 30 in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과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째 네 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 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 · · ·
*야경꾼: 밤 사이에 화재나 범죄가 없도록 살피고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
*유구하고: 아득하게 오래고.
*너어스: 너스(nurse). 간호사.
*거즈(gauze): 가볍고 부드러운 무명배. 흔히 붕대로 사용함.
*포로 경찰: 도망가는 포로를 잡는 경찰.
※출처:《사랑의 변주곡》, 창작과비평사, 1990.
□ 오연경 교사 감상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나만 알고 있어도 되는 나의 치부나 부끄러운 부분을 여러 사람들 앞에 고백하는 것은 아마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시인은 때로 자신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맨얼굴 그대로 시를 통해 공개하기도 합니다.
시는 소설에 비해 상당히 압축적인 형식이지만,
시인의 고백적인 시에는 그의 개인사나 신변 정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요.
김수영 시인은 실제로 6·25 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뛰어난 영어 실력 덕택에 미군 야전 병원에서 통역을 하면서 간호사들과 가까이 지냈던 수용소 경험이 이 시에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는 실제로 "어느 날 고궁을 나어면서" 떠오른 생각을 시로 쓴 것일까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을 다스리는 높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상징하는 '고궁'은 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기에 아주 적절한 무대가 됩니다.
거대한 권력의 덩어리 앞에서 '찍'소리 못 하고 순응하는 나,
모래보다도 머지보다도 작은 부끄러운 나를 거대한 고궁을 배경으로 어깨를 구부린 채 걸어 나오는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은 아주 훌륭한 설정이지요.
이 시에서는 당시 갈비탕 한 그릇의 가격, 통행금지 제도와 그것을 감시하던 야경꾼, 베트남 파병의 역사 등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배경이 사실 그대로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고궁'과 '모래'라고 하는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시인의 내적 정서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시적 장치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출처:《국어교과서 작품읽기》, 창비, 2010.
□ 김수영(1921~1968) 시인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헸디.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다녔다.
성적은 우수했으며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
동경 성북예비학교에 다니며 연극을 공부했다.
1943년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일본에서 귀국했다.
심영 등과 연극을 했다.
1946년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했다.
시 「廟庭의 노래」 를 발표했다.
1946~1948년 연희전문 영문과 4년에 편입하였으나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49년 김경린 등과의 친교로 시론과 시를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을 간행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다 탈출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부산, 대구에서 통역관 및 선린상고의 영어교사 등을 하였다.
1959년 1948~1959년 사이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개인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을 간행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이후 죽기까지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 발표하는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다.
1968년 6월 15일 밤 귀가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쳤다.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여 사망했다.
1974년 시선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5년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민음사), 1976년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민음사), 산문선집 『퓨리턴의 초상』(민음사), 1981년 『김수영 전집』 시·산문(민음사), 2003년 개정판『김수영 전집』 시·산문(민음사) 등이 간행되었다.
1982년 민음사에서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로 정희성을, 수상작으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선정했다.
※출처: 교보문고 작가파일, 김수영